

빨간 신호등 켜진 ‘윤리적 리더십’
위의 사례들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게 놀랄만한 뉴스거리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문화 면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일들이 됐다. 특히 도덕적·윤리적 논란에 휩싸일만한 사건들은 비일비재하다 못해 지겨운 일이 될 만큼 무뎌가고 있다.
그렇다. 현재 대한민국의 윤리적 리더십에는 빨간 불이 켜져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지도 모르고, 풀어야 할 산적한 과제 앞에서 그저 두손 두발 들고, 자신만큼은 비윤리적 리더로 낙인 찍히지 않길 바라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 진정한 윤리적 리더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리더피아> 편집팀은 자신 있게 ‘누구’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떠올랐다가도 섣불리 말할 만한 자신감이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투명하다고 했던 리더들이 하루아침에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혹여라도 추천한 누군가가 또 구속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불안감에서다. 그리고 윤리적 리더십이라는 것을 철저히 검증할 길이 없다는 것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윤리적 리더십’을 다뤄야 하는 근본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숨어 있다면 찾아내고, 없다면 미래의 윤리적 리더를 키워내기 위한 사명감을 갖고서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가치’이다. 개인, 혹은 조직, 국가 등이 원하는 가치에 따라 선택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러한 가치관은 개인, 조직, 국가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은 동일하다. 바로 선한 가치,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명제다. 우리는 얼마나 올바른 가치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윤리는 인간의 바른 행동을 다루는 미시적 영역인 ‘라이트 컨덕트(Right Conduct)’와 행복한 삶, 조화로운 삶을 찾고 누리기 위한 방법을 찾는 거시적 영역인 ‘굿라이프(Good Life)’로 구분 짓는다. 여기서 윤리와 도덕의 개념은 동일한 것으로 본다. 국어사전에 수록된 윤리와 도덕의 뜻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 및 바람직한 행동기준’이라고 나와 있다. 동양에서 도덕이란 말은 유교적 어감이 강하고, 유교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해 근대에 이르러서는 ‘윤리’라는 용어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스어 ‘ethos’, 라틴어 ‘mores’, 독일어의 ‘Sitte’ 등이 모두 ‘습속’이라는 뜻처럼, 원래 도덕이란 자연환경의 특성에 순응하고 각기 그 집단과 더불어 생활해온 인간이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간 방식과 습속에서 생긴 것이다. 생활양식이나 관습의 경험을 정리하고 남기기 위해 인간집단의 질서나 규범으로 정하고 엄격하게 지켜나간 데서 생긴 것이 도덕의 시초다. 때문에 도덕과 법의 근원의 맥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법은 사회적 외적 규제로, 도덕은 개인의 내적 규제 수단으로 분화됐는데, 계급사회 성립과 함께 법과 도덕은 정치 지배의 유력한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더불어 법이 국가 권력을 지배하고, 도덕이 보편적 원리를 지배하는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초등학교 시절 ‘바르게 사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지침서였던 도덕 교과서가 고학년이 될수록 ‘윤리학’이라는 따분한 학문적 성향에 묶여 이론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합리적인 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귀찮은 존재로 서서히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귀찮은 존재가 인생의 마지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뒤늦게 깨닫고 있다는 데 문제 의식을 함께 해야 한다.
이민호 한국윤리전략연구원의 윤리경영센터 소장은 윤리의 중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윤리의 중요한 영역인 삶의 가치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왜곡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삶의 가치에 관심이 있으면 효용가치를 중시하고, 삶의 가치에 무관심하면 투자가치를 중시하게 되지요. 우리 사회는 효용가치에 비해 투자가치가 아주 높게 형성된 심하게 왜곡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가 리스크 상태에 놓인 것과 같아요. 이는 우리 국민들이 윤리의 주요 영역인 굿라이프에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기업 등 모든 조직에서도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며, 그것이 이상적인 구조입니다.”
도덕성 지키려면 용기와 민감성 필요
나에게 쓸모 없는 땅이 평당 500만원에 팔린다고 그것을 좇는다면 그 사람은 효용가치보다 투자가치에 더 치중한 삶이 되는 셈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평당 100원짜리 땅이라도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미련 없이 500만원 짜리 땅과 바꿀 수 있는 자, 그런 사람은 바로 효용가치에 삶의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그런 사람을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워진 게 현실이다.
이 설명을 뒷받침할만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아이의 사생활-도덕성’편을 방송한 바 있다. 방송은 서울대 교육학과 도덕심리연구실과 서울대 심리학과 발달심리연구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도덕성이 주는 영향력에 관한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들에게는 사례금 10만원을 지급한다고 공지했고, 실험이 끝난 후 개별적으로 그들에게 준 돈은 15만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맞느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실험참가자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것도 철저히 계산된 테스트 중 하나였다. 아주 사소한 일로 참가자들의 도덕성에 관한 허점을 찌른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도덕적 행동에는 용기와 민감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쟁, 부패, 탈법 등 크고 무시무시한 게 도덕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덕은 예측하지 않은 자신의 바로 주변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양심이 바로 도덕의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이에 관해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는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도덕은 연습된 행동이지요. 의사결정, 의지, 판단력, 심리적인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이뤄지는 판단입니다.”
여기서는 도덕성의 요소로 정서(양심·공감·이타성), 인지(자제력·책임감·분별력·공정성), 그리고 행동 및 실천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서나 인지 부분은 뛰어나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도덕성은 결여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또다른 실험이 이어졌다. 초등학생 300명을 대상으로 한 도덕성 변인에 관한 연구다. 미리 도덕성에 관한 필기 테스트 후 도덕성 지수가 높은 아이들과 평균 아이들로 그룹을 나누어 아이들의 도덕성 지수를 가늠해보기로 했다. 관찰카메라를 통해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 게임의 규칙을 지키는 확률이었는데 놀랍게도 도덕성 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생각과 행동의 일치를 보였고, 평균 그룹의 아이들은 유혹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밖에 다양한 실험 등을 통해 도덕성은 아이의 모든 행동과 거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집중력, 또래관계, 과잉행동, 문제행동, 공격성, 왕따 가해 및 피해 경험 등이 도덕성이 약한 그룹일수록 두드러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즉 드러나지 않는 도덕성이 아이의 모든 행동을 규정하고 있었다.
즉, ‘도덕적이고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며, ‘도덕성이 높으면 아이들의 경쟁력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단순히 게임 규칙 위반 여부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도덕성이 낮은 아이들일수록 좌절극복 지수도 낮았으며, 희망 및 도전 능력 지수도 낮았다. 그러나 도덕성이 높은 아이들도 경쟁, 익명성, 시간의 촉박함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었을 때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이렇게 도덕성이 높은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사회 경쟁 속에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 더 강하게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데에만 급급해질 확률이 높다. 즉, 상황에 따라 언제고 포기할 수 있는 게 바로 도덕성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인생의 마지막이 도덕성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첫 단추를 어릴 때 꼭 알맞게 채웠느냐에 따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정직을 확인하는 순간만큼 행복해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도덕적이지 못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덕적이면 손해를 본다’는 편견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실험 등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결과를 인식하게 된다. 실제 수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도덕성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로 제시하는 접근은 ‘도덕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도덕적인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하는 합리적 선택은 가장 도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성 때문에 윤리적 리더십을 합리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닐까.
토마스 네이글은 기본적인 요구, 변명, 거절을 통해 회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요구들에 정당화의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당화를 위한 시도를 성공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도덕적으로 행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왜 합리적인 것을 따르는 것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합리성은 ‘무언가를 위한 이유’와 관련이 깊다. 이유라는 것은 합리적 사고 수준에 적용됐을 때 무언가를 믿거나 수락할 이유에 관계하고, 그것이 행위의 수준에 적용되면 그것은 행위를 취할 이유가 된다. 이런 생각은 어떤 이유에 의해 지지되는 것을 믿거나 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합리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왜 합리적인 게 도덕적이어야만 한 것인지 그 힘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이유를 ‘최선의 이유’ 때문에서 찾는다면 모든 도덕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이며 동시에 합리적인 것은 도덕적이라는 공식이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공식은 논리가 맞지 않다. 이 둘은 서로의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이것은 외적인 최선과 실제 최선인 두 가지 갈림길이 존재한다. 최선이라고 보이지만 그것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인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도덕적인 것은 합리적이지만 그 역의 관계는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포하고 있다.
도덕은 우리가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고 도덕적인 행위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가 확대된 관점에서의 선택을 통해 정당화하고자 한 도덕적 행위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취할 모든 행동을 포괄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가 통상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이라 부르는 것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인간됨, 사람다움이란 것은 또 어떤 것을 뜻하는 걸까.
‘인간됨’이란 인격이 잘 형성되어 동물의 삶처럼 생명에만 얽매이는 게 아니라, 정신적 삶도 잘 살고, 자아 발전적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어찌 보면 윤리·도덕적 삶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고양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삶, 자아발전적 삶, 고양된 훌륭한 삶은 모두 인격이 잘 형성됐을 때 가능한 삶이다. 인격이 잘 형성됐을 때 그 인간은 정신적 생활의 방향이나 성향이 더 높은 가치를 지향하고 추구하게 된다. 즉, 더 높은 감정이 발로하여 더 놓은 가치를 지향,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격이 잘 형성되어서 더 높은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면 당연히 더 놓은 가치를 선호하여 실행하는 윤리적 선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윤리적이게 되는 것이다. 윤리학자 막스 셸러는 인격과 윤리·도덕적인 삶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인간의 내면의 오묘한 감정을 어느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도덕·윤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부터 보고 배우고 느낀 것들의 총합체가 인격이 되고, 자신의 가치 판단에 따른 가치관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수히 많다.
마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가지를 만들고, 열매가 열리게 하는 일련의 과정과도 같다. 만약 나무가 뿌리 내릴 환경이 아닌데 억지로 자라게 될 경우 원래 종자에서 이탈한 돌연변이 나무가 될 확률이 높다. 또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판단했지만 썩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경우는 또 왜 그러한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어떤 요소가 가해졌기 때문에 썩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이런 나무의 경우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모르는 채 놔둔다면 계속 썩은 열매가 달리고, 줄기와 뿌리까지 썩게 될 것이다.
윤리의 족쇄가 선순환 구조 부른다
도덕성과 윤리성은 배운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고쳐질 것은 아니지만, 문제점을 인식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찾아 나설 때 비로소 조금씩 뒤틀린 가지와 뿌리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사람됨을 통해 윤리성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윤리적 리더십이다. 단순히 도덕성만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윤리 의식과 창조를 통한 최상의 가치를 창출해 일반인에서부터 오너, 주주 등의 이해관계자들을 정정당당한 실력과 경쟁을 바탕으로 신뢰를 확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속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21세기의 최고 신성장동력이 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십 중 최고의 형태를 도덕·윤리적 리더십을 꼽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하트마 간디와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사람들의 도덕 수준을 높이 끌어올렸다. 훈계 따위의 방식으로 도덕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를 폭넓게 전달하고 그것들을 전달하는 목적과 이유, 그리고 중요성까지 흐트러짐 없이 전달하는 능력을 지녔다. 리더십은 사람들의 욕구와 희망에 부응하는 변화를 세상에 가져다 주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도덕적 필연성을 가져야 한다. 최상의 공적 가치들을 추구할 때 리더십과 팔로십이 어우러져 사회 변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발목에 ‘윤리’라는 꽤 불편하고 힘든 족쇄를 채운 것이 나중에는 결국 ‘좋은 가치’로 되돌아오고, 나 자신뿐 아니라 기업, 국가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앞으로 나올 사례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으로 구분지어 윤리적 리더십이 잘 발휘된 성공 사례와 그렇지 못한 실패 사례가 등장하게 된다. 사례들은 각각 뿌리, 줄기, 열매의 형식을 가지고 유기체적으로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도덕적 모범을 아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동안 우리가 몰라서 못했던 것이 아니지만, 진정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가 하나가 되어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더불어 당신의 도덕·윤리성 지수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지금부터 내면 깊숙이 감춰진 윤리적 인식의 눈을 떠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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